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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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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책 속에서 우리가 자란 시간📚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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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리는 책 속에서 우리가 자란 시간📚

듣는 소설 프로젝트 ‘첫 여름, 완주’🎧



박정민 대표, 김금희 작가(사진 : 채널예스)


음성 파일을 재생하자 낭독자의 목소리가 나온다.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지만 흔한 '오디오북'과는 다르다. 건조한 서술보다 구체적인 대화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대화도 감정이 실린 연기처럼 느껴진다. 실제 고민시, 염정아, 김도훈, 최양락 등 걸출한 배우들이 낭독자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군데군데 효과음도 들어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도 아닌데 OST까지 만들었다.



장르를 파악하기 힘든 이 신선한 오디오 창작물은 출판사 '무제' 대표인 박정민 배우와 김금희 작가가 함께한 소설 '첫 여름, 완주'의 오디오북이다. ‘첫 여름, 완주’는 박정민 대표가 무제를 통해 기획한 오디오북 프로젝트 ‘듣는 소설’의 일환이다. 시각장애인의 ‘독서할 권리’를 위해 이 신박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는 박정민 대표와 김금희 작가. 그들의 이야기를 한국장애인재단이 들어봤다.




장애인이 더 빨리 접할 수 있는 책


‘첫 여름, 완주’ (사진 : 출판사 무제)


‘첫 여름, 완주’를 만드는 과정은 다른 출판과는 완전히 달랐다. 보통 책은 출판된 후 오디오북이나 전자책으로 제작된다. 아무리 베스트셀러라도 시각장애인 독자가 오디오북으로 만나기까지는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다. '첫 여름, 완주'는 오디오북을 먼저 제작한 뒤 실물 책으로 출판됐다. 덕분에 이 소설은 시각장애인이 일반 독자보다 먼저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책이 됐다. 이미 몇 번 책을 출판해 본 경험이 있는 박정민 대표에게도 이번 작업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박정민 대표(사진 : 에스제이그룹)


(박정민 대표)

“원고가 나오고 나서 종이책을 바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디오북을 먼저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책 발행까지 두 배 정도의 시간이 걸리더군요. 그저 낭독이 아닌 배우들의 연기, 성우의 서술, 효과음과 음악, 그리고 믹싱의 단계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이 많아서 시간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요.”



출판 작업만 특별했던 건 아니다. 소설의 형식, 등장인물의 비중 등 많은 것이 새로웠다. 이번 소설이 ‘듣는 소설’ 프로젝트의 일환이 될 것이라는 걸 알았던 김금희 작가는 소설 집필을 위해 시각장애인 독서 모임에도 참여했다. 시각장애인이 책을 어떻게 접하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처음 모임에 참여해 봤다는 김금희 작가는 시각장애인이 어떤 부분에 관심이 많은지, 오디오북을 들을 때 어떤 점을 어려워하는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소설에 온전히 반영했다.


김금희 작가(사진 : 한겨례출판)


김금희 작가가 가장 먼저 배운 건 시각장애인이 소설 속에서 ‘시간 이동’을 어려워한다는 점이다. 소설은 시간의 흐름이 자주 바뀌는데, 그것이 오디오로만 들었을 때 혼란을 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금희 작가는 ‘첫 여름, 완주’에서 인물들이 과거와 현재를 되도록 오가지 않고 음향 등으로 충분히 알 수 있게 쓰려고 했다. 독서 모임 참석자 중 수상스키를 즐기고 발레를 하는 등 ‘움직임’에 관심이 많은 이들도 있었다. 이에 김금희 작가는 주인공들이 산을 걷고, 뛰고, 하늘을 날 수 있게 했다.



소설 속 인물의 비중도 바뀌었다. 주인공 ‘열매’의 할아버지는 글을 못 읽는다. 처음에는 할아버지의 비중이 크지 않았지만, 김금희 작가는 모임에 다녀온 후 그의 이야기를 더 길게 늘렸다. 할아버지야말로 한글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얼굴’이라는 자신만의 문자로 평생을 열심히 살아간 인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위해, 또 더 많은 독자를 만나기 위해

박정민 대표는 '첫 여름, 완주'를 출판하기 전에도 장애인의 문화 접근권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장애인재단 시각장애인 오디오북 제작사업의 낭독 봉사자로 참여해 재능기부를 한 적이 있고, 자신이 출연한 영화 '밀수' 화면 해설 상영회를 개최한 적도 있다. 상영회를 위해 자비로 영화관을 대관하고 행사 진행비도 기부했다.


시각장애인 초청 영화 ’밀수‘ 화면해설 상영회


박정민 대표가 시각장애인을 이렇게 가깝게 느끼는 데에는 그의 아버지 덕이 크다. 아버지는 그가 출판사 무제를 통해 첫 책을 출판하던 2020년쯤 시력을 잃었다. 아들이 처음 만든 책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들었고, '시력을 잃은 가족을 위해 내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약간의 무력감도 생겼다. 그 마음이 박정민 대표를 ‘듣는 소설’ 프로젝트로 이끌었다. 박정민 대표의 마음은 그가 ‘첫 여름, 완주’의 출간 소식을 알리며 직접 작성한 보도자료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박정민 대표(사진 : 출판사 무제)


(박정민 대표)

“저희 회사의 첫 책 <살리는 일>이 출간될 즈음 아버지께서 시력을 잃으셨습니다. 아들이 만든 첫 책을 보여드릴 수 없다는 생각에 조금 상심했고, 아버지께 책을 선물할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듣는 소설’이라는 것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와 같이 시력이 좋지 않으신 분들이 독서와 가장 멀리 떨어져 계신 분들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었고, 그분들께 책을 선물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오디오북을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김금희 작가의 경우 시각장애인이라는 새로운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그를 이끌었다. '듣는 소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던 박정민 대표는 2022년 6월 김금희 작가에게 합류를 제안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대사가 중요했는데, 박정민 대표가 평소 김금희 작가 소설의 대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서술보다는 대사가 많은, 어쩌면 반은 희곡에 가까운 소설을 써달라’는 주문도 함께했다. 김금희 작가는 당시 이미 계약한 다른 소설을 쓰고 있었음에도 수락했다. 취지가 마음에 들었고, 작가로서 이전에 써본 적 없는 형식의 소설을 쓰게 된다는 점도 새로운 도전처럼 느껴져서다.


김금희 작가(사진 : 문화일보)


(김금희 작가)

“박정민 대표가 제안했을 때야 시각장애인이 음성언어로 정보와 문화를 누리신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베스트셀러가 오디오북이 되기까지 몇 개월을 기다리신다는 사실도요. 모든 책이 그렇게 유통되는 건 문제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오디오북, 그리고 시각장애인이 먼저 읽는 소설, 성우와 배우가 참여해 만든다는 점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경험


‘첫 여름, 완주’ 굿즈(사진 : 에스제이그룹)


박정민 대표는 공들여 탄생한 ‘첫 여름, 완주’를 여러 가지 방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렸다. 우선 굿즈를 만들었다. 책 모양을 작게 만든 키링, 주인공들의 일러스트가 담긴 북마크, 책 내용 일부가 필사된 포스터 등이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기도 했다. 박정민 대표는 처음엔 굿즈를 만드는 데 회의적이었지만 수익금을 좋은 의도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의견이 그를 설득했다. 실제 그는 굿즈 판매 수익금을 한국장애인재단에 기부했다.


장애인의 날을 맞아 두 사람은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북콘서트도 진행했다. 박정민 대표는 책이 출간되기 훨씬 전인 지난해 가을쯤부터 도서관을 찾아 북토크를 제안했다. ‘듣는 소설’이 시각장애인 독자에게 선공개하는 책으로 만들어진 만큼 그들을 첫 관객으로 모시고 북토크를 진행해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도 그 아이디어를 반갑게 받아들였고, 지난 4월 17일 100여 명의 시각장애인 관객과 함께 북토크를 열 수 있었다.



(박정민 대표)

“북토크 당일까지도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그저 이미지를 위해 오지랖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 같기도 했고, 오디오북 자체에서 불편함을 느끼실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오디오북을 듣고 오신 독자분들께서 제게 응원의 말씀을 많이 해주셨고, 덕분에 앞으로 계속해서 해나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첫 여름, 완주’ 북콘서트(사진 : 국립장애인도서관)


김금희 작가 역시 그 자리에서 느낀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행사 시작부터 김금희 작가는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는 뜻깊은 경험을 했다. 처음 객석에 앉아 사회자의 소개를 받을 때 평소처럼 꾸벅 목례했는데, 순간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안녕하세요!” 하고 소리친 것이다. 뒷좌석의 시각장애인분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 바로 앞에 있었구나.” 했다고 한다.


(김금희 작가)

“‘더 큰소리를 내어서 인사해야 했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박수가 나올 만큼 좋아해 주셨어요. 독자의 첫 소감을 들은 터라 감동적이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반응도 있었어요. 참석자 중 한 분이 오디오북을 읽으셨는데, 오디오 파일이 앞으로 되감기가 안 됐나 봐요. 원하는 부분을 듣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들었다고 하시는 말씀이 기억이 남아요. OST <초록>이 너무 좋았다고 하신 것도요. 노래는 소설로 다 전할 수 없는 리듬을 담아내고 있거든요.”


작품을 만들고 알리면서 들어간 그들의 진심이 전달된 덕분일까. 오디오북은 출간 직후인 지난 5월 교보문고에서 오디오북 주간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했다. 종이책 역시 소설 부문 일간 1위에 올랐다.




그 어떤 작품보다 나를 성장시킨 작품

시각장애인의 ‘책 읽을 권리’를 조금이나마 신장시키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두 사람은 공통으로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스스로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특히 ‘너무 한낮의 연애’, ’경애의 마음‘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 작품을 남긴 김금희 작가가 ’이번 작품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기회는 없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 점은 놀랍다. 처음에는 독자를 위한 기획이라고 생각했는데 쓰다 보니 자신이 넘어온 허들과 어려움들이 가만히 떠올랐다는 것이다. 작품을 다 쓰고 나올 때는 어느 작품보다 ’내가 조금 더 성장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김금희 작가는 이번 작업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도 했다. 소설의 깊이를 전달하는 방식을 달리하느라 애쓰는 과정에서 배운 점이 많아서다. 예를 들어 소설은 서술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주제를 심화시킨다. 그러나 ‘첫 여름, 완주’를 쓰면서는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 위주로 소설을 작성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금희 작가는 깊은 생각을 서술하는 대신 말로 전하고, 그래도 부족한 부분은 사건, 상황, 장면을 통해 묘사하려고 했다.


박정민 대표, 김금희 작가(사진 : 엘르)


박정민 대표도 마찬가지다. 그는 북콘서트 참석자들이 그에게 보내준 응원의 메시지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제 마음과 최선을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주신 것 같아서, 그 행사에서 가장 큰 용기를 얻은 것은 어쩌면 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라고 박정민 대표는 말했다.


동료 배우 중 동참하려는 뜻을 지닌 이들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 것도 박정민 대표에게는 큰 수확이다. 이번 작품에는 박정민 대표를 포함해 10여 명의 배우 낭독자들이 참여했다. 주인공 손열매 역할은 고민시 배우, 어저귀 역할은 김도훈 배우, 수미 엄마 역할에는 염정아 배우 등이 재능기부로 함께했다. 박정민 대표는 배우들 모두에게 개인적으로 참여를 부탁한 뒤, 배우들이 수락하면 소속사에 연락해 원고를 전달했다.


‘첫 여름, 완주’ 오디오북 참여 배우(사진 : 출판사 무제)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첫 여름, 완주’ 낭독에 참여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좋은 일에 동참할 수 있어 감사하다’라는 말을 박정민 대표에게 전했다고 한다. 아직 참여하지 못한 동료 배우들의 전화도 더러 받았다. 박정민 대표는 이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프로젝트가 ‘밝아지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또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열정도 재차 솟구쳤다.


의미 있는 프로젝트를 통해 활력을 찾은 덕분일까. 두 사람은 앞으로 세운 계획을 공유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당분간 출판사 무제 업무에 매진할 계획을 밝힌 박정민 대표는 ‘조금 더 시각장애인 독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구상해보려고 한다’라는 생각을 밝혔다.


박정민 대표는 다음 오디오북을 만들 때 다른 녹음 방식을 취해보려고도 한다. 배우들의 스케줄이 맞아야겠지만, 여러 배우가 동시에 녹음을 진행하면 어떨지 궁금해 한번 시도해 볼 예정이다. 또 시간이 오래 지난 소설들을 재해석해 ‘듣는 소설’을 만들어보는 것도 아이디어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금희 작가, 박정민 대표(사진 : 채널예스)


지난해 소설을 쓰기 위해 무려 남극까지 다녀온 김금희 작가는 가을까지 독자들을 만나며 이미 출간된 책들의 안부를 계속 전할 예정이라고 했다. 재충전의 시기를 거쳐 올해 겨울부터 새로운 소설 준비에 들어갈 예정이다.


사람들이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 지역, 감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시선에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느끼면 우리는 그 대상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김금희 작가가 인터뷰 마지막에 한 이 말은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첫 여름, 완주’를 꼭 만나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경험해 본 적 없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다.


“<첫 여름, 완주>는 요모조모 따져보며 들으면 매번 다르게 읽히는 소설이라고 겸연쩍지만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 인물들의 삶을 매만져주는 기분으로 사랑해주세요. 저도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소설을 계속 쓰겠습니다.”


기획 : 황신아, 선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