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름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사회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사이좋게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고 싶어요.”🎨
판타지 동물로 사랑을 그리는, 권라빈 작가🐘💕

권라빈 작가의 그림에는 분홍빛 동물들이 가득하다. 사자 같기도 하고, 코끼리 같기도 하고, 기린 같기도 한 신비로운 모습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판타지 동물들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다. 저마다 다른 모습과 색깔을 하고 있지만 한 화면 안에서 다정하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판타지 동물작가’라고 소개하는 권라빈 작가는 올해 건국대학교 현대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미술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최근 개인전을 열어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판타지 동물들을 통해 사랑과 공존의 이야기를 그려 나가고 있다.
판타지 동물들이 살아가는 세상
권라빈 작가의 그림에서는 달콤하고 포근한 사랑이 느껴진다. 분홍색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등 무지개색이 곁들여진다. 그리고 작품 곳곳에 하트 무늬가 들어가 있다. 관람객들이 그의 그림에서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권라빈 작가)
“분홍색은 저에게 ‘사랑’이라는 느낌이에요. 또 무지개색은 환상의 힘을 보여줘요. 사랑과 환상은 제 그림에서 중요한 키워드예요. 저는 현재 판타지 동물 시리즈를 작업하고 있어요. 작년부터 시작해서 앞으로도 계속 시리즈로 그려볼 생각이에요. 머릿속에 셀 수 없이 많은 판타지 동물들이 있거든요. 서로 다른 모습이지만 사이 좋게 살아가는 세상을 표현할 거예요.”

권라빈 작가는 상상의 동물들을 그리는 일에 몰두 중이다. 동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지 않고, 여러 요소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권라빈 작가에게 판타지 동물은 단순히 상상 속 생명체가 아니다. 각각의 동물은 이름과 성격, 직업, 관계를 가진 하나의 존재다. 왕과 왕비, 공주와 왕자도 있고, 친구와 형제자매도 있다. 어떤 동물은 패션 디자이너이고, 어떤 동물은 마법사다.
작가는 길을 걷거나 일상을 보내는 중에도 새로운 캐릭터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곤 한다. 현재 세 번째 시리즈를 작업 중인 권라빈 작가는 앞으로 스물네 번째 시리즈까지 이어갈 계획이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수없이 많은 동물이 탄생을 기다리고 있다.
상상력의 씨앗이 자라다
권라빈 작가의 어머니에게도 그림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어린 시절 다른 활동에는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가 그림 앞에만 앉으면 몇 시간이고 몰입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권라빈 작가에게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였고, 가족에게는 아이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준 창문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도록 종이를 준비해 놓곤 했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라빈이가 그림을 그리다가 마음에 안 들면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곤 했어요. 하루가 지나면 쓰레기통이 꽉 찰 정도로 많은 그림을 그려냈죠. 종이를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개념조차 모를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A4용지에 그림을 그리도록 했어요. 당시에는 색연필 사용을 좋아했는데요. 그래서 새로운 색연필을 발견하면 사다 날랐어요. 중국에 거주할 때였는데, 한국에 들어오면 가방 한가득 미술 재료를 사 가곤 했죠.”

그렇게 그림은 자연스럽게 놀이가 되었고, 곧 상상의 세계를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 당시 권라빈 작가가 즐겨 그린 그림은 ‘유니콘 시리즈’이다. 지금의 판타지 동물 시리즈와도 연결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기보다 느끼고 상상한 세계를 온전히 화폭에 담아냈다. 동물을 꾸미고, 새로운 특징을 부여하고, 현실에는 없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작업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작품 속에 등장하는 판타지 동물들은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상상력의 흔적이다.
손에 힘이 생기고부터 색연필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권라빈 작가. 그 습관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 그리는 데 쓴다. 일상 속에 그림이 들어와 있다는 개념보다는, 일상 그 자체가 그림인 셈이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떠와서 이젤 앞에 앉는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다가도 다시 작업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하루의 대부분이 그림과 함께 흘러간다. 어머니는 권라빈 작가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비결은 결국 연습량 덕분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권라빈 작가)
“저는 그림 그리는 게 좋아요. 특별히 힘들 때가 없었어요. 그림을 그리면 늘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림 밖 세상으로 나아가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딸을 두었지만, 어머니는 대학에 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처럼 그저 집에서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도록 해주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중국에 살며 제가 수학 강사로 일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학생들의 입시 얘기를 자주 하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라빈이가 자기도 대학을 가보고 싶다는 거예요. 미술대학에 가서 조금 더 배워보고 싶다고 했어요. 딸이 진로에 관한 얘기를 한 것이 처음이라, 그 길로 수소문을 해서 포트폴리오부터 만들었죠. 미술을 전공한 동네 엄마가 우연히 그 포트폴리오를 보게 되었고, 개인전을 열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그게 시작이었지요.”
중국에서, 그것도 무명의 10대 작가가 연 개인전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작품이 판매되었다. 첫 개인전의 성공은 가족에게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많은 관람객이 권라빈 작가의 그림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고, 소장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출발점이 되어 단체전과 개인전으로도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경험은 권라빈 작가가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에서 ‘작가’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게 권라빈 작가는 건국대학교 현대미술학과 입학생이 되었다. 1학기 때는 온라인 수업을 위주로 했고, 2학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오프라인 수업을 한다. 이제부터는 보호자인 어머니의 손을 떠나, 장애학생지원센터 서포터즈의 도움을 받아 학교생활을 해볼 생각이다. 권라빈 작가보다 어머니가 더욱 긴장되고 떨린다고 말한다. 특히 중국에서 오랜 시간 국제학교를 다녔던 권라빈 작가에게 한국의 대학은 완전히 새로운 환경일 것이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라빈이는 중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과 생활했어요. 자연스럽게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라빈이 역시 장애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의식하지 않은 채로 성장했지요. 대학에 가서 어떻게 생활할지 걱정도 되지만 새로운 경험을 잘 해낼 거라고 믿고 있어요.”
가장 든든한 지원군
어머니는 권라빈 작가의 든든한 서포터다. 권라빈 작가는 작품 활동을 할 때 가장 많은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이 바로 ‘엄마’라고 얘기한다.

(권라빈 작가)
“엄마는 제가 공모전에 접수하고, 작품을 출품하는 데에 도움을 주세요. 또 제가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가 있는지 찾아보시고 알려주시죠. 제 그림을 보고 엄마가 ‘완전 어울려!’, ‘굿잡(Good Job!)’, ‘완전 멋져!’ 이렇게 말해주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나요.”
하지만 언제나 칭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때론 날카로운 비평으로 딸이 작가로서 더욱 성장하도록 이끈다. 예를 들면, 하트 모양을 자주 그리자 하트가 없는 그림도 그려볼 것을 권했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라빈이가 하트 모양을 너무 반복해서 그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림에서 주인공이 보이지 않고 하트만 눈에 띄니까, 이제부터는 하트를 그리지 말아보자고 했죠. 그랬더니 그림에 하트를 숨겨놓기 시작했어요. 동물들의 눈동자를 하트 모양으로 바꾸거나 말발굽, 날개 끝에 작은 하트를 그려 넣는 거예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숨어 있는 하트를 찾는 것이 라빈이 그림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 되더라고요. 전시회에 그림 설명을 달 때, ‘하트가 몇 개 있는지 찾아보세요’하고 적어놓으면 관람객들도 재미있게 즐기시더군요. 어찌 되었든 하트는 권라빈 작가를 말해주는 시그니처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마음껏 그리라고 하고 있어요.”
더 많은 관람객을 만나다
전시회를 열고 대학에 진학하며 권라빈 작가의 세계가 넓어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SNS를 통해 작품 사진을 올린다거나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면서, 더 많은 관람객, 더 넓은 세상과 연결되는 중이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라빈이 그림을 알리고자 SNS를 시작했어요. 주변 학부모들이 발달장애 예술가들의 활동 사례를 소개해 주고, 인스타그램 운영 방법도 알려주었죠. 처음에는 단순히 작품을 기록하기 위한 공간이었지만, 점차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구가 되었어요.”

실제로 권라빈 작가의 학교생활 영상과 일상 콘텐츠는 수백만 회에 가까운 조회 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작품뿐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가진 매력 역시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기 시작한 것이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권라빈 작가와 환상적인 느낌의 작품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오가며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어머니는 딸을 통해 새로운 일들에 도전하는 요즘이 참 즐겁다고 얘기한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라빈이가 아니었으면 SNS를 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겠죠? 또 작품 공모전을 찾거나 전시회를 열 방법을 알아보는 일도 없었을 거예요. 얼마 전에는 KBS1TV <사랑의 가족>에 출연하게 되어서 촬영을 했어요. 이전에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라빈이는 저에게 꿈꿔본 적 없었던 세상을 만나게 해줘요. 그래서 요즘 우리 가족의 일상이 참 재미있답니다.”
받은 사랑을 다시 나누며
권라빈 작가는 얼마 전,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한국장애인재단과 롯데홈쇼핑이 함께하는, 시각장애 아동을 위한 ‘드림보이스’ 서포터즈로 선발되어 오디오북 제작에 나선 것이다. 시각장애 아동의 정보 접근성 향상을 위해 오디오북을 제작 및 보급하는 의미 있는 활동에 힘을 보탰다.

(권라빈 작가)
“목소리로 표현하는 오디오북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평소에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성우가 되어보고 싶다고 꿈을 꾸어본 적이 있었거든요. 이번에 시각장애 어린이들을 위한 영어책을 낭독했어요. 아이들에게 오디오북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글자를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읽으려고 노력했어요. 뜻깊고 재미있는 경험이었어요.”
평소 그림을 그릴 때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상을 틀어놓고, 성우들의 목소리를 따라 할 때가 많다 보니 목소리로 내용을 전달하고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또한 국제학교에 다니며 한국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 등 3개 국어에 능통한 점도 낭독자로서의 강점이다. 어머니는 낭독봉사 활동이 꾸준히 이어지기를 바랐다. 앞으로도 점자도서관에서 꾸준히 책을 녹음하기로 했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드림보이스 활동이 좋았기 때문에 계속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도서관에 문의를 하니, 낭독봉사자가 필요하다고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라빈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 한두 가지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도서관에 가서 녹음봉사 활동을 할 계획이에요.”

어머니는 권라빈 작가가 ‘받는 사람’만이 아닌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판매된 작품의 10%는 무조건 기부하는 원칙도 세웠다. 작가로서 작품이 팔리는 뿌듯함을 넘어서서,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는 활동을 통해 더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달력과 엽서 등의 굿즈를 제작해서 판매하고, 수익금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을 위한 센터에 기부하기도 했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아이가 자폐라는 걸 처음 알았을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지요. 특히 부모가 없는 세상에서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까를 생각하면 너무 두려워요. 그래서 라빈이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아이가 되지 않고, 남한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어요. 그 나눔이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요. 앞으로도 기부하고 봉사할 기회가 생기면 더 많이 할 거예요.”
그림으로 표현하는 사랑과 공존
어머니는 딸의 이야기할 때마다 ‘인복이 많은 아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실제로 지금까지의 과정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국제학교 시절에는 다른 학부모들이 장애를 가진 아이를 어려워할 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어준 학부모가 있었다. 또 현대무용을 전공한 지인은 권라빈 작가를 단체 수업에 초대하며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전시와 공모전 정보를 알려준 사람들, 작품 활동을 응원해 준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는 이러한 만남들이 지금의 권라빈 작가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권라빈 작가 어머니)
“좋은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났어요. 제가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여주신 분들이에요. 그래서 라빈이도 나중에는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주면 좋겠어요.”
권라빈 작가가 그림 속에서 끊임없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그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자신이 받은 사랑과 도움을 다시 세상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권라빈 작가는 그림을 그리고 목소리 연기를 하고, 언젠가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자신이 느낀 사랑과 행복의 감정을 그림으로, 목소리로, 음악으로 표현하는 예술가가 되는 모습을 상상한다.
권라빈 작가의 작품 『함께라는 이름의 우리』에서는 다양한 판타지 동물들이 한 화면 안에 모여 있다. 사자를 닮은 동물도 있고, 코끼리를 닮은 동물, 토끼를 닮은 동물도 있다. 저마다 색깔도 다르고 모습도 다르지만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어울려 살아간다. 권라빈 작가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이다.
그림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싶다는 권라빈 작가. 오늘도 그는 새로운 판타지 동물들을 그려 넣으며, 사랑과 공존이 있는 세상을 한 장 한 장 완성해 가고 있다.
기획 : 박로사, 남궁소담
사진 : 홍경택